뚜르몽드 김근보 셰프 꾸준히 성장하는 제빵사 “제가 제과제빵을 시작하고 처음 구입한 책이 월간 <제과제빵(현 파티시에)>이었는데 영광이네요” 1996년, 서른 살의 늦은 나이에 빵을 배운 청년은 20년 후 당당한 기술자로 성장해 그간 꼼꼼히 챙겨보던 잡지 속 한 코너를 당당히 장식한다. 남들보다 늦게 출발선에 섰지만 누구보다 부지런히 달려 단 한 번도 뒤쳐진 적 없는 제빵사. 먼 길을 돌아 찾아낸 천직인 만큼 꿈 많은 김근보 셰프의 레이스는 길고 긴 제빵사 인생의 초석일 뿐이다. 취재 · 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늦깎이 제빵사가 사는 법 대학 시절 김근보 셰프는 ‘운동권’ 학생회의 일원이었다. 그 꼬리표 때문에 그는 제대로 사회활동을 하기가 힘들었다. 여러 계약직을 전전해야 했지만 그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 빵과 전혀 관련 없는 인생을 살던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는 다름 아닌 대우자동차의 부도였다. “대우자동차 하청회사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할 때였어요. 대우자동차가 부도가 나면서 하청회사들도 문을 닫기 시작했죠. 그러면 직원들은 명예퇴직을 할 것인지, 남아 있을 것인지 선택을 하거든요. 그때 명예퇴직을 선택한 선배들이 빵집을 오픈한 거예요. 소식을 듣고 한번 가봤는데 장사가 너무 잘되더라고요” 빵이 불티나게 팔려나가는 풍경, 주방에서 제빵사들이 빵을 만드는 모습은 그에게 완전히 신비로운 세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그때 처음 제빵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했다. 1996년, 그의 나이 서른. 스무 살도 안 된 학생들에 비하면 한참 많은 나이였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선배의 빵집 그린비 제과점에서 설거지부터 배웠다. 그의 진짜 직장이자 첫 빵집이었다. 그는 본점에서 근무했는데 당시 그 주변에 뷔페가 많이 생기면서 납품 주문이 밀려 들어왔다. 롤케이크, 각종 쿠키, 샌드위치 등을 대량으로 만드느라 주말은 늘 비상이었다고. 적은 월급에 생활하기가 빠듯했지만 일이 너무 즐거워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린비 제과점에서 1년을 일한 후 그는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휴식기를 가졌다. 갑자기 무리해서 몸을 쓴 탓이었다. 쉬는 시간이 아까워 선배들의 만류를 뒤로 하고 제과제빵기능사 자격증을 준비했다. “처음 반죽을 배웠을 때 소금을 계량하지 않은 적이 있어요. 우유 식빵 20㎏을 다 망쳐버렸죠. 소금이 없으면 빵이 발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그때부터 이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몸으로 익힌 것을 머리로 이해하고 나니 오히려 그 원리가 명확해졌다. 그는 지금도 후배들에게 “현장에서 부딪혀보고 나서 자격증을 준비하는 편이 더 많은 도움이 된다”고 조언한다. 몸과 정신을 재정비한 후 입사한 곳은 서초동에 위치한 케익하우스 엠마. 1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는 엠마에서 그는 반죽을 담당했다. 그런데 이번엔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대량 주문이 많아 한 반죽으로 몇 가지 종류의 빵을 만들던 그린비 제과점과 달리 엠마는 모든 빵의 반죽이 다르고 종류가 다양했던 것. 그는 머랭이나 카스텔라 반죽이 낯설기만 했다. “동생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제가 서투른 부분에 대해 1~2개씩 팁을 주면 매일 퇴근 후 연습을 했죠” 그렇게 롤케이크 시트를 마는 법, 팥빵의 앙금을 포앙하는 법, 파이 반죽을 미는 법 등을 차근차근 익혀나갔다. 2년이 지나자 그는 오히려 자신보다 높은 직급의 셰프들이 담당하는 제품들까지 섭렵할 수 있었다. 기본 빵들을 터득하고 나니 자연스레 케이크에 눈길이 갔다. 버터케이크보다 생크림케이크의 수요가 많아지던 시기, 그의 목마름을 채워준 곳은 태릉의 브레드 몽테다. “그때 크로네 제과점이 케이크로 굉장히 유명했거든요. 케이크 디자인을 보려고 퇴근 후 일주일에 3번씩 들르곤 했어요” 홀로 연습만 거듭하던 어느 날 그에게도 기회가 생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생산부장이 손을 다치는 바람에 케이크를 만들 일손이 부족해진 것. 그는 자신 있게 손을 들었다. 일반 빵집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판매되는 케이크는 2,000여 개. 그의 제과 실력은 그 시간을 보내면서 일취월장했다. 뿐만 아니라 엠마 본점에서는 세미나, 기술 전수, 직급 테스트 등이 이뤄졌는데, 그는 더욱 다양한 케이크를 배우고 싶은 마음에 본점에서 기술 전수를 받기도 했다. 이토록 배움의 열정이 대단한 점에 대해, 셰프는 늦게 시작한 만큼 빠르게 터득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동료들의 대부분이 어린 동생들이다보니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도 컸단다. 그는 자신이 가진 악조건들을 시간으로 극복해내려 노력했다. 업계의 흐름을 타고 함께 변화해온 뚜르몽드 마지막 직장이었던 케익하우스 빠나미를 그만두었을 때 셰프에게는 러브콜이 쏟아졌다. 그러나 그는 책임자로 경력을 쌓는 대신 오너셰프가 되기로 결심한다. 2002년 노원구에 8평 규모의 빵집 뚜르몽드를 오픈했다. 뚜르몽드는 오픈과 동시에 대박이 났다. 다얗안 빵을 갖춘 토탈 베이커리는 주민들의 열렬한 반응을 얻었다. 제빵사가 된지 6년 만에 오픈한 빵집. 하물며 시행착오 없이 단번에 성공을 이룬 것을 보며 누군가는 부러움의 눈빛을 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머지않아 독으로 작용했다. “1억원을 투자해서 가게를 오픈했는데 1년도 되지 않아 빚을 갚았어요. 그래서 돈맛을 너무 빨리 알았나 봐요. 2004년에 제품 관리를 제대로 못해 매출이 반으로 뚝 떨어졌죠. 그제야 다시 뒤를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방황하던 그를 붙잡은 것은 아내 김선주 씨였다. “다시 해보자”는 아내의 한 마디는 그를 일으켰다. 매장은 물론 제품도 리뉴얼을 실시했다. 2005년 에꼴드쉐프에서 당시 유행하던 초콜릿을 배우고 그해 겨울 초콜릿 봉봉을 신제품으로 출시했다. 포장을 배운 아내의 손을 거쳐 탄생된 초콜릿 봉봉 세트는 크리스마스, 연말 시즌과 맞물려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그후 그는 지속적으로 트렌드에 맞춰 제품을 바꿔나갔다. 제과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한 것도 그 연장선이다. “한창 프랜차이즈 빵집에 영향을 받던 시기라 스스로 내세울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어요” 제과기능장이란 타이틀은 그에게 의미가 남달랐다. 제과제빵 시장에서 차별화할 수 있는 무기이자 새로운 배움의 자극제였으며 도전을 위한 시험대이기도 했다. 2008년 2전3기의 도전 끝에 그는 기능장 타이틀을 수석으로 거머쥐었다. 제과기능장이 되고 나서 셰프는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기술적으로 진보를 할 것인지, 경영을 배워볼 것인지 고민이 됐어요. 경영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기능장을 딴 다음해인 2009년, 고려대학교 평생교육원 타전공이수 과정을 통해 시간제 강의를 듣고 4년 후인 2013년 경영학사를 취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그 4년 동안 그에게 또 하나의 변화가 찾아온다. ㈔대한제과협회로부터 호출이 온 것. 그는 프랜차이즈 빵집이 가장 성행하던 시기에 가장 활발하게 대외 활동을 펼쳤다. 물론 이로 인해 전보다 매장에 신경을 쓰지 못했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오히려 이를 통해 오너셰프로서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제과제빵업계의 현황을 다시 보게 됐죠. 세상은 빠르게 변하는데 우린 변함이 없더라고요. 프랜차이즈를 막연히 탓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장점인 기술력과 조직력으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필요한 것은 ‘협업’이에요” 그가 직접 기획하고 브랜딩한 1년간의 단기 프로젝트 ‘해피 브레드’는 협업의 효과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 해피 브레드는 민부곤 제과점, 뚜르몽드, 델리명과, 이대근 과자점 등 노원 지역 빵집 4곳이 재료 구매부터 제품 개발, 마케팅까지 함께 실시하는 공동 브랜드였다. 당시 서울신용보증재단에서 소상공인 지원책의 일종으로 실시한 이 프로젝트에서 해피 브레드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이를 계기로 그의 이름과 뚜르몽드가 알려지면서 매출은 다시 30~40% 뛰었다. 또한 해피 브레드를 발판으로 탄생된 ‘디어블랑제’는 현재까지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하리라 2016년 5월 김근보 셰프는 매장 확장을 감행했다. 가장 큰 이유는 기술자로서 그동안의 후퇴를 만회하기 위함이었다. “트렌드에 맞춰 변화해나가는 빵집들이 결국 살아남더라고요. 저 역시 한창 유행이던 건강빵, 천연발효종 빵을 도입하기로 했죠. 그런데 기존 매장은 건강빵을 생산할 수 있는 설비가 부족하고 제품군을 늘리기에도 협소했어요. 게다가 빵과 커피를 함께 판매하려고보니 매장 확장이 답이더라고요. 폴인브레드, 라베이크와 같이 모델이 될 만한 빵집들을 찾아다니며 벤치마킹을 했어요” 그 뿐만이 아니다. 매장을 안정시키기 위해 요즘 그는 다시 건강빵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몇 번씩 위기를 겪기도 했고 매출도 오르락내리락 했지만 뚜르몽드가 노원구에서 15년간 자리를 지킨 동네빵집이라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장사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예요. 약속대로 문을 열고 트렌드에 맞춰 주기적으로 제품을 바꾸고 작은 홍보라도 하는 거죠. 전 15년 동안 1년에 9번을 쉬고 매일 아침 일찍 문을 열었어요” 고객들에게 뚜르몽드가 그 자리에서 안주하지 않고 늘 더 좋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고객과의 신뢰다. ‘뚜르몽드(tour de monde)’는 프랑스어로 ‘모든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빵을 만들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15년이 지난 지금, 그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뚜르몽드만의 고객이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이제는 뚜르몽드 하면 떠오르는 빵이 무엇인지 찾는 것이 목표예요. 아직은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아마 전국의 오너셰프들이 저와 같은 고민을 할 거예요. 그것을 바탕으로 뚜르몽드를 성장시켜야죠” 직원들 휴무를 늘리고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그는 뚜르몽드가 직원들이 편하게 오래 다닐 수 있는 직장이 돼야 경쟁력도 생기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신의 건물에서 지금보다 더 큰 규모로 탄탄하게 매장을 운영하길 꿈꾼다. 또 한편으로는 3권의 책을 내고 싶은 소망도 갖고 있단다. 20년을 해왔음에도 언제나 처음처럼 꿈을 꾸는 욕심 많은 제빵사. 평생 이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김근보 셰프의 욕심에 눈살이 찌푸려지지 않는 이유는 그 욕심의 몇 배는 더 치열했으며, 앞으로도 치열할 그의 시간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