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파르나스 박정훈셰프
비앤씨월드 [
2015-11-30 15:02:47 ]
제빵을 흠모한 남자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파르나스 박정훈셰프 무거운 덤벨과 바벨로 몸을 키우던 보디빌더 청년이 어느 날 작정하고 빵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파르나스 박정훈 셰프의 한 줄 과거사다. 가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이 남을 법도 하건만, 그는 오히려 “제빵으로 전향해 참 다행이다”라고 말한다. 올해 제과장이라는 무거운 직함을 단 박정훈 셰프를 주방, 델리 매장, 뷔페 레스토랑 세 곳을 오가며 인터뷰했다. 취재․글 구명주 사진 이재희 아령을 놓고 반죽을 들다 어릴 적, 박정훈 셰프의 집에는 아령이 항상 놓여 있었다. 운동과 친한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인지 아들은 보디빌더를 꿈꿨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보디빌더 선수로 전국체전에 출전해 메달을 따기도 했으니, 이대로라면 무난하게 체육인으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찾아온 심각한 어깨 부상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전국체전을 앞두고 벌어진 일이었다. ‘충격을 크게 받았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셰프는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고 냉철하고 담담하게 그때를 진단했다. 셰프는 무겁고 차디찬 운동기구를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대신 그가 움켜쥔 것은 가볍고 보드라운 밀가루였다. 터프한 보디빌더가 난데없이 세심함을 요하는 제과제빵에 도전한 것이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황당한 전개였다. 그러나 그는 ‘드디어 때가 왔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운동을 하면서도 제빵의 세계를 남몰래 동경했던 그였다. “먼 친척 중 한 명이 안산에서 브레드 바스켓이라는 제과점을 운영했어요. 그래서인지 빵을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죠. 운동을 관둔 뒤엔 주저하지 않고 친척의 제과점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박정훈 셰프는 ‘나는 고생하지 않고 빵을 배운 사람’이라 고백했다. 다른 셰프들처럼 일반적인 빵집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혹독한 막내 생활을 견뎌야 했을 테지만, 그는 오히려 친척 오너셰프의 돌봄을 받았다. 그러나 편하다는 건 바꿔 말하면 정체돼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군대를 제대한 그는 결국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 나선다. 한국제과학교에 들어가 처음부터 다시 제과제빵의 기초를 쌓고, 유명 윈도베이커리에 문을 두드린 것. 제과학교를 졸업한 셰프는 학교의 소개를 받아 신림동 삐에스몽테에 취업했다. 친척의 제과점에서 일했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당시 대부분의 제과점이 그러했듯이 삐에스몽테의 근무환경도 그다지 좋지 못한 게 사실이었다. 작업대와 오븐 사이에 낀 채로 일을 할 정도로 주방은 협소했으며 만들어야 할 제품의 가짓수와 양은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오죽했으면 출근 첫날, 제과점을 관둘 궁리를 했을까. 하지만 일이 즐겁고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좋아, 셰프는 1년 가까이 삐에스몽테에서 제품을 만들었다. 삐에스몽테 다음으로 입사한 곳은 안스베이커리 광명점. 셰프는 제과학교에 다닐 때 몇 번 마주쳤던 안창현 명장을 그곳에서 다시 만났다. “지금이야 제과기능장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만, 1990년대만 해도 제과기능장 자격증을 가진 사람이 극히 드물었어요. 그때 안창현 명장님은 제과기능장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과기능장을 준비한 것도 명장님의 영향이 컸죠” 셰프는 2007년 제과기능장 자격증을 취득했다. 우연한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 파르나스와의 만남 우직하게 빵과 디저트만을 바라본 셰프가 호텔과 인연을 맺은 건 2000년대 들어서다. 2000년 조선호텔베이커리에 입사한 그는 데이앤데이, 달로와요 등 마트와 백화점 안에 입점한 계열사 빵집에서 근무했다. 호텔베이커리 소속이면서도 호텔 밖에 발을 담그고 있었던 그는 ‘호텔 안 세상’을 동경했다. 달로와요 영등포점의 제과장으로 근무하던 중 셰프는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셰프를 상시 채용한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호텔로 들어갈 기회가 온 것이다. 셰프는 호텔 인사팀에 채용을 직접 문의해 이력서를 넣었고, 끝내 합격통보를 받았다. 2003년 입사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그는 12년간 근속하고 있다. “저희 호텔의 스테디셀러는 딸기케이크입니다. 딸기 철이 되면 호텔끼리 경쟁이라도 하듯 ‘딸기 디저트 뷔페’를 벌이잖아요. 저희가 딸기 디저트 뷔페를 처음으로 시도했다고 자부해요. 내년에도 딸기 철이 돌아오면, 메뉴를 정비해 30여 종의 딸기 디저트를 내놓을 겁니다” 호텔 자랑을 쉬지 않고 이어가던 셰프는 재미난 에피소드를 하나 들려주었다. “몇 년 전, 웨딩케이크를 챙겨오기로 한 고객이 실수로 케이크를 준비해오지 못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저희 팀으로 ‘웨딩케이크를 최대한 빨리 준비해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죠. 자칫 잘못하면 케이크 없이 결혼식이 시작될 지도 모르는 다급한 상황이었거든요. 저희 팀원들은 일사불란 하게 손발을 척척 맞춰 케이크 시트를 자르고 크림을 발라 10여 분만에 케이크를 완성해냈습니다. 결혼식이 시작되기 불과 몇 분 전에 말이죠. 나중엔 결혼 당사자들로부터 고맙다는 인사까지 받았고요” 결혼식, 국제행사 등 각종 연회가 끊이지 않는 호텔의 특성상 일촉즉발의 순간은 항상 찾아온다. 셰프는 그래서 항상 긴장을 잃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까지 큰 사고 없이 일을 해낸 건 베이커리팀의 팀워크가 좋아서였던 것 같아요” 제과장이 된 지금 그는 다짐한다. 직책이 높다고 하여 높은 벽을 세우고 귀를 닫지 말자고. 리더인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는 ‘소통’이다. 또한 호텔 레시피를 정돈하는 작업을 그는 팀원들과 꾸준히 해오고 있다. 누가 오더라도 수월하게 일을 하기 위해선 기본 자료가 중요하다고 판단해서다. “옛날엔 제과가 더 좋았는데 요즘은 제빵에 더 끌려요. 호밀이 몇 퍼센트 들어가면 어떻게 발효가 되는지, 르방은 언제 냉장고에서 꺼내야 좋은지 등 하나씩 테스트하며 나만의 공식을 만들어가는 게 즐겁더라고요. 하지만 어렵게 발견한 노하우를 저 혼자 알면 소용없죠. 기술은 나눠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글이나 사진을 첨부한 레시피를 정리하고 공유하고 있습니다” 파르나스 타워와 완공되는 내년이면 셰프는 지금보다 더 바빠질 것 같다. 델리 매장이 파르나스 타워와 호텔을 연결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한식 양식 일식 주조 자격증까지 갖춘 만능맨 박정훈 셰프는 한국의 제과업계가 발전하기 위해선 ‘한국 스타일을 느낄 수 있는 제과’를 추구해야 한다고 오래 전부터 생각했다. “짭조름한 과자, 얇은 반죽 안에 팥이 조화롭게 들어간 과자를 맛보면 사람들은 일본을 떠올리죠. 예쁘고 섬세한 포장도 일본의 상징이고요. 한국도 한국만의 스타일이 느껴지도록 포지셔닝 해야 합니다” 감으로 만든 무스, 두부 푸딩, 검은깨 푸딩, 오미자 젤리 등 인터컨티넨탈은 이미 다양한 한식 디저트를 연회 메뉴로 선보이고 있다고 했다. “한식 세계화에 관심이 많은 배한철 총주방장님 덕분에 저희 호텔의 한식 디저트는 유독 다채롭고 맛있죠. 한국의 식재료는 의외로 서양의 디저트와 잘 어울린답니다” 대학에서 호텔조리를 전공한 셰프는 음식 관련 자격증까지 두루두루 갖추고 있다. 제과제빵기능사는 물론이고 한식조리기능사, 양식조리기능사, 일식조리기능사, 조주기능사까지. 제과제빵기능사는 제과학교 재학시절 취득했으며 조리관련 각종 자격증은 뒤늦은 대학 공부를 하던 무렵 땄다고 했다. “수업과 연관된 시험을 본 것일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자격증은 그의 성실함을 증명하는 증표임이 분명했다. 심지어 2007년에는 직업훈련교사자격증, 2012년에는 베이커리위해요소 관리사 자격까지 취득하기에 이른다. 자격증뿐만이 아니다. 제과제빵기능사 문제를 출제하고 감독하기, 동경제과학교나 에콜 발로나 등 해외로 단기 연수 떠나기, 각종 대회에 출전하기 등 셰프가 해온 여러 활동을 훑어보면 그제야 알게 된다. 박정훈 셰프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지는 24시간을 잔잔하게 쪼개어 쓰는 사람이구나. 그건 마치 보디빌더가 식욕을 관리하며 자신의 몸을 탄탄하고 굴곡지게 만들어 나가는 모습과 비슷했다. “아주 옛날엔 요리 셰프를 할까 하고 음식점을 기웃거린 적도 있어요. 양식 레스토랑에 취업했다가 불과 15일 만에 나와 버렸죠. 왜냐면 요리를 하는 내내 제빵이 자꾸만 생각났거든요” 이미 그때 그는 깨달았다. 자신이 제빵 없이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란 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