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스티크 성시학 셰프 건실하게 쌓아올린 탑 인생의 수많은 선택지에서 매 순간 최선의 답안을 고르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성시학 셰프의 선택은 언제나 ‘빵’이라는 고난이도 시험에서 오늘보다 내일 더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한 방책이었다. 스물 셋 무렵 제빵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20여 년 후 셰프의 손길이 고스란히 담긴 빵집 ‘루스티크’를 오픈하기까지 그의 선택에는 밀가루 한 톨 만큼의 미련도 변명도 없었다. 취재·글 박소라 사진 이재희 서초동 ‘루스티크’는 처음 김영모 과자점 공장장 출신의 셰프가 운영하는 빵집으로 이름을 알렸다. 20년 만에 ‘내 가게’를 오픈한 성시학 셰프에게 있어 ‘김영모 과자점 공장장’이라는 타이틀은 어드밴티지였고 동시에 패널티였다. 힘들게 얻은 명성을 바닥에 내려놓고 다시 1층 계단부터 한칸 한칸 오르기를 어언 4년, 이제 루스티크와 김영모 과자점의 연결고리를 구태여 언급하는 사람은 없다. “루스티크 앞에서 만나” 루스티크가 동네 주민들에게 고유명사처럼 불릴 때, 엄마 손을 잡고 들어온 어린 아이가 늘 먹던 빵을 단숨에 집어 보일 때, 셰프는 몇 백만원의 매출이 적힌 장부를 볼 때보다 짜릿함을 느낀다고 했다. 그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성시학 셰프는 매일 아침 설레는 마음으로 빵을 굽는다. 연장 대신 밀가루를 들다 성시학 셰프는 경북 상주 촌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때만 해도 상주는 남자들이 짚신을 신고 갓을 쓰고 다니던 가부장적인 동네였다. 당연히 ‘빵을 만든다’는 것은 상주에서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하던 셰프는 기술을 익히고 싶었다. 동네 친구들은 평범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갈 때 그는 항공 정비사 자격증을 따 곧바로 군대에 입대했다. 그런데 막상 취업을 하려고 보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내키지 않았단다. 결국 셰프는 진정으로 원하는 일을 찾아 나섰다. 상주 ‘촌놈’의 인생을 바꾼 첫 번째 선택, 그것은 바로 빵이었다. 손으로 할 수 있는 많은 것들 중에서 제빵을 고른 이유는 단순했다. 셰프는 상주에서 상경한 후 먹었던 크로켓의 맛을 잊지 못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처음 빵이란 걸 먹어봤는데 그게 ‘고로케’였어요. 신세계였죠. 너무 맛있었거든요” 더 나아가 ‘빵이라면 살아가면서 남을 속이지 않고 함께 나눌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뒤늦게 꿈을 정하고 나니 그 꿈을 현실로 만들어줄 연장이 필요했다. 셰프는 빵을 배우기 위해 CJ에서 운영하는 국비지원 직업훈련원을 찾는다. 그곳은 당시 CJ가 뚜레쥬르를 론칭하기 전에 시범적으로 ‘샹제리제’라는 매장을 운영하면서 제빵사를 양성하는 곳이었다. “CJ 훈련원에서 빵을 배우고 나면 프랜차이즈 업체로 취직을 하는 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어요. 하지만 저는 ‘나만의 빵’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윈도 베이커리를 물색했죠. 그때의 제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시간이 지나고 깨달았어요” 매끄러운 아스팔트를 두고 험한 자갈길로 들어섰지만 훗날 치열한 베이커리 시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셰프가 유일하다. 그때부터 셰프는 서울의 빵집들을 전전하며 기술을 익힌다. 첫 직장인 신사동의 조그만 제과점에서 1년간 오븐을 담당한 후 녹번동 은평구청 앞에 있던 샤모니 제과점에 입사했다. 당시 샤모니 제과점은 서울에서 손꼽히던 빵집이었다. 셰프는 그곳에서 빵의 기본 틀과 요령을 익혔다. 게다가 만주를 잘 만들던 사장님과 버터 크림 장식을 기가 막히게 잘 하던 공장장님은 셰프에게 있어 선망의 대상이었다. 언젠가는 두 사람을 보란 듯이 뛰어넘으리라. 밑도 끝도 없는 오기였지만 그 오기는 젊은 제빵사를 한층 성장하게 했다. 오랜 시간 탄탄하게 다진 입지 ‘현장이 실력’이라는 말이 있듯 현장에서 직접 부딪히고 경험을 쌓다 보면 실력도 그에 비례해 차곡차곡 쌓이기 마련이다. 성시학 셰프는 해가 지날수록 누적되는 경험과 실력의 힘을 믿는 사람이었다. 특히 셰프는 세 번째 직장인 티트리스 제과점에서 일하던 시절을 잊지 못한다. “기술에 대한 욕심이 유독 컸던 시기였어요. 어설프게 설탕을 끓여 설탕공예를 흉내 내고 그랬죠.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조청으로 장난친 건데 그땐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요. 자랑하고 싶어서 아침 일찍 공장장님 출근하시는 길목에 슬그머니 놓아두곤 했죠” 여기서 다가 아니다. 그 무렵 셰프들 사이에서 ‘버터 크림 꽃 짜기의 달인’으로 통했던 함상훈 셰프의 작품을 보면서 무작정 따라해 보기도 했단다. 그 후 셰프는 2년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버터 크림을 짜는 연습을 했다. 어느새 훌쩍 성장한 실력은 김영모 과자점에서 꽃을 피운다. 성시학 셰프는 김영모 과자점에서 제빵 인생의 반을 보냈다. 무려 13년간 근속을 하는 동안 사원에서 주임, 과장, 차장, 부공공장장, 공장장으로, 소위 승진을 했다. 이는 처음부터 공장장으로 입사하여 10년을 일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묵묵히 이겨내는 인내가 필요했다. IMF 시기에는 많은 제빵사들이 다른 일자리를 찾아 떠나기도 했다. 그때마다 셰프를 버티게 해준 것은 빵에 대한 소박한 욕심 하나였단다. “내일은 더 나은 빵을 만들어야지” 선배들에 비해 부족한 점들을 하나씩 메우기 위해 쉼 없이 보내다 보니 10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수많은 공장장들의 등을 보면서 걸어온 셰프에게 ‘공장장’은 단순한 직함 이상이다. 그는 김영모 과자점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면서 빵집에서 겪을 수 있는 ‘경우의 수’를 모두 경험해보았다고 했다. 당시만 해도 공장장은 사장의 직무 대리인이었다. 제품 생산은 기본이고 매장 관리, 직원들의 복장 체크, 서비스까지 신경 써야 했다. 사실상 빵집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기술자의 능력과 사업가의 자질을 모두 배운 셈이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처럼 별다른 위기 없이 제빵사로서의 단계를 차근차근 밟아왔지만 셰프에게도 슬럼프는 있었다. 공장장으로 일할 때 셰프의 밑에 있던 후배들이 가게를 낸다는 이유로 하나둘 퇴사를 한 것이다. 공장장의 위치에 있다 보니 후배들에게 뒤쳐지는 것만 같아 때때로 조바심이 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안도 없이 움직일 수는 없었다. 셰프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 후 해가 여러 번 바뀐 2013년, 셰프는 서초동에 루스티크를 오픈한다. 루스티크를 오픈하기까지 셰프는 만반의 준비를 했다. 서울의 내로라하는 빵집에서 10년 이상을 보내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타성에 젖어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지금까지 만든 빵의 레시피를 모두 새로 바꾸기에 이른다. 현재 루스티크의 빵은 셰프가 그 동안 만들던 빵과 반죽부터 다르다. “루스티크의 빵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빵이라면 사람들이 왜 굳이 루스티크에 오려고 하겠어요. 루스티크를 오픈하기 전의 성시학은 서울의 대표 빵집을 이끄는 공장장이었지만 루스티크의 성시학은 구멍가게 사장님이랑 다를 바가 없잖아요. 제가 가진 건 근사한 배경이 아니라 빵 만드는 재주 하나라는 현실을 직시하고 시작하니 마음이 편했어요” 생각해보면 성시학 셰프는 늘 현재를 살았다. 미래에 무언가 거창한 것을 이룬다기보다 지금 중요한 일을 우선시했다. 대신 정말로 적기라고 판단되었을 땐 온 힘을 다해 돌진했다. 다행히도 루스티크는 오픈하자마자 유명세를 떨쳤다. 연령대가 높은 서초동 주민들은 이스트를 최대한 줄이고 천연발효종을 사용해 저온 숙성법으로 만든 건강한 빵에 매력을 느꼈다. 루스티크는 1년 만에 옆 가게를 인수해 규모를 확장하며 승승장구했다. “제게 있어 훌륭한 교본은 외국의 유명 셰프가 만든 레시피 책이 아니라, 손님 한명 한명의 입맛이에요. 그게 바로 루스티크가 살아남는 방법이죠” 서초동을 지날 때면 몸가짐도 바르게 한다는 그는 루스티크에서 그렇게 하고 싶었던 ‘성시학표’ 빵을 만들며 매일 행복한 전쟁을 치르는 중이다. 이젠 루스티크가 서초동 건강 빵집으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만큼, 앞으로는 루스티크의 내실을 좀 더 키울 생각이다. 사람을 중시하는 마음으로 빵을 만들다 권상범, 서정웅, 김영모 셰프 등 지금은 명장이 된 제빵업계의 초대 셰프들이 후배들에게 있어 ‘드림’이었던 시절, 성시학 셰프는 시대를 풍미한 대선배들을 닮고 싶었다. 그들이 걸어온 길을 자신도 동료들과 함께 나란히 걷길 원했다. 그리고 그 소박한 소망은 제빵사라는 직업에 의미와 동기를 부여해주고 있다. “요즘은 동료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예전만 못해 안타까울 때가 많아요. 물론 기술을 향상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같은 길을 걸어온 동료들이 훗날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가 될지, 후배들도 제대로 느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를 하는 동안 ‘인복이 많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뇌던 셰프는 한 번 인연이 닿았던 동료들의 손은 쉬이 놓지 않는다. 한 예로 젊은 시절부터 같은 빵집에서 일하며 동료이자 선배로 큰 힘이 되어준 김록훈 셰프와는 각자의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지금도 하루 두세 번씩 통화할 정도로 끈끈하게 인연을 맺고 있다. 음식은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하물며 사람의 손에 밀착되어 한참을 부대껴야 겨우 반죽이 완성되는 빵은 오죽할까. 빵 맛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결국 반죽을 손에 쥔 사람이다. 성시학 셰프의 빵 맛이 유독 구수하고 담백한 까닭은 그가 ‘사람의 가치’를 아는 제빵사이기 때문일 것이다.